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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한 차례 지나가고, 후덥지근한 공기 사이로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오는 7월의 오후,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 도착했습니다. 옛 대법원 건물인 미술관의 고풍스럽고 수수한 외벽에 설치된 유영국 작가의 전시 현수막에 새겨진 강렬한 붉은 산이 온통 시선을 빼앗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근대 거장전’ 시리즈의 첫번째 프로젝트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준비하였습니다. 본 전시는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시작된 추상미술에 대한 실험을 거쳐 생애 후반 완성한 심상추상에 이르기까지 60년 동안의 작가의 궤적을 회화, 부조, 사진, 드로잉 작품 등을 통해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전시는 크게 5개의 섹션으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연대순으로 작품을 전시하는 기존 방식과는 달리, 본 전시에서는 작가가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던 1964년의 작품들로 첫 번째 섹션을 구성하고, 두번째 섹션에서는 작가가 미술공부를 시작하게 된 1935년으로 한 번 거슬러 올라왔다가, 세번째 섹션부터는 1964년 이후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을 시간 순으로 전시하는 방식을 선택하였습니다. 다소 생소한 방식이긴 했지만, 작가로서의 전환점에서 완성한 작품들을 먼저 감상하고, 예술의 뿌리를 찾아 탐구한 후에 다양한 실험을 통해 전개되는 작품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과정은 과거에서 또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작가의 아카이브를 거쳐 첫 번째 섹션에 들어서면, 100호가 넘는 거대한 작품들이 저마다 묵직한 에너지를 뿜으며 관람객들을 압도합니다. 1964년은 48세였던 작가가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앞으로 동인전이 아니라 2년에 한 번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서만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한 해입니다. 작가는 1964년을 기준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고자 “구도자로서의 고독”을 선택하였습니다.

 

대다수 작품의 명칭은 <Work> 또는 <산>으로 단순하고, 대체로 “산”이라는 단일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칭과 소재의 단순함에 반해, 캔버스 채운 다양한 형상들은 거침없는 붓터치와 두껍고 불균일한 마티에르(matière, 소재, 재질)로 표현되어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빨강, 파랑, 초록, 노랑, 흰색이 서로 섞이고 대립하면서 만들어낸 에너지는 원시부족의 제례의식과 같은 원초적인 역동성 그 자체였습니다.

 

<Work>(1961)

 

<Work>(1964)

 

인상적인 대형작품들을 뒤로 하고, 작가가 추상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 즉, 예술세계의 근원을 살펴보고자 두번째 섹션으로 이동해봅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한 작가는 자유주의적 학풍 속에서 당시 일본에 소개되었던 전위적인 서구 아방가르드 미술사조를 자연스럽게 흡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서구의 추상미술, 특히 작가 몬드리안이 수직, 수평, 삼원색을 통해 추구했던 기하학적 추상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의 1940년 작품 <Work>은 화면을 가르는 수직선과 색채의 구성이 언뜻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케 합니다. 다만 작가는 몬드리안이 친구 되스부르크와 절교선언까지 하며 거부했던 ‘대각선’을 사용하거나 직선 아닌 ‘곡선’을 사용한다거나, 삼원색 외에도 다양한 색상을 활용하며 자신만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Work>(1940)

 

한편 작가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울 것을 걱정하여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기도 하는데요, 작가의 사진 속 피사체는 지나치게 클로즈업 되어 있거나 독특한 구도로 촬영되어 있어, 작가는 이미 피사체를 구상의 객체가 아닌 추상의 객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석굴암 내부 불상(좌), 경주 불국사 대웅전(우)>

 

 

군국주의가 팽배한 당시 일본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추구하는 동시대 작가들이 탄압을 받는 모습을 목도하고, 작가는 1943년 고향 울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린 작가는 생계를 위해 어선을 타고 양조장을 경영하며 10여 년 간 상당한 부를 이루게 되지만,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한 작가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작가는 다시금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한 결단을 내렸고, 1964년 개인전을 개최하며 자신의 선언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 섹션에서는 작가가 1964년의 선언 이후 매일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던 시기에 시도했던 다양한 추상실험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큰아들이 아버지는 왜 산을 그리시냐고 묻자, 나는 피카소 같은 천재적인 재능이 없고, 산은 소재가 다양하기 때문에 산을 선택한 것이라 답했다고 합니다. 해당 섹션에서는 산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1960년대 중후반까지는 작가가 굵은 곡선, 겹겹이 쌓아올려 만들어진 색채의 깊이, 투박한 마티에르를 통해 산을 표현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풍부한 감성을 환기시키는 작품들이 주류입니다. 1958년 작인 <아침>은 아침 햇살이 산등성이를 노랗고 밝은 빛으로 환하게 물들이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 속에도 빛이 한 가득 차오르고, 같은 해 완성된 <봄비>는 촉촉히 내리는 빗줄기가 새싹을 틔워 겨울산을 점차 초록빛으로 물들여주는 모습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아침>(1958)

 

<봄비>(1958)

 

반면, 1968년 전후에 이르러서는 작품 속 산과 해는 단순하게 도형화하였고, 선과 면 역시 수직,수평,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형상의 단순화를 통해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가 엿보입니다. BTS의 멤버 RM이 소장한 <Work>(1968) 또한 해당 시기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설계도면 같이 딱딱한 바탕화면에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상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원근감과 리듬감을 입혔습니다.

 

<Work>(1971)

 

 

<Work>(1968)

 

 

네번째 섹션에 들어서면, 작가가 완성한 ‘심상추상’의 세계를 목도하게 됩니다. ‘심상추상’은 산으로 표상되는 자연과 내가 자신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사물의 본질을 마음의 형상으로 표현해내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작가는 1977년 심장박동기 부착수술을 받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8번의 큰 수술과 37번의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는데요. 악화된 건강상태와 노년작가로서의 원숙함은 정교한 추상실험을 고수하는 대신 사물의 본질을 내면화하고자 하는 변화의 계기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생전 “산을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고, 그것이 인생인 것 같아서 내 그림의 산 속에는 여러 모양의 인생이 숨어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각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내적인 평온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마도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였던 예술의 경지가 아니었을까요.

 

해당 섹션의 작품들은 중성적인 색채와 부드러운 곡선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평온함이 느껴지는 작품이 다수 찾아볼 수 있는데요. <Work>(1979) 역시 노랑, 빨강, 갈색을 주로 사용하여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단풍으로 물든 산과 들을 연상케 하여 수확의 계절이 주는 충만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Work>(1979)

 

또한 작가는 ‘심상추상’의 일환으로 현재에 머무르는 1차원적인 산이 아닌 4계절을 아우르는 산의 본질을 하나의 화면에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도 하였는데요. 색동저고리 같이 발랄한 색감으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산의 모습을 하나의 화면 안에 표현한 <사계절>(1981)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쌓여간 시간의 궤적 속 잊고 있었던 추억을 소환시키며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였던 매력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계절>(1981)

 

마지막 섹션에 들어서면 작가의 말년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데요, 작가가 걸어왔던 추상미술의 길을 반추하듯 작가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구현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처음으로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초대형작품 <산-레드>와 <산-블루>(1994)는 다양한 추상시도가 이루어졌던 1968년 이후의 작품과 닮아있었고, 물 위에 비친 달빛이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워 많은 관람객들의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던 <Work>(1993)은 심상추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마음을 한없이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작가의 절필작 <Work>(1999)은 산과 산이 포개지며 하늘 위로 뻗어나가는 형상으로 아득히 먼 미래까지 닳을 수 있을 것 같은 영원함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타오르는 작가의 예술혼이 느껴져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Work>(1993)

 

<Work>(1999)

 

 

출구 앞에서는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유영국 : 무한을 걷는 사람>를 상영하고 있는데요, 추상미술이 너무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해당 영상이 유영국 미술문화재단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되어 있으니 미리 감상하고 미술관을 방문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감상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작품의 숲을 거닐며 색과 선의 아름다움에 취했다가 천부적인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에 숙연해지고, 종국에는 내면의 평온을 찾게 되는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본 전시는 10. 25.까지 계속된다고 하니, 매미 울음 소리가 가득한 한여름 더위도 식힐 겸, 선선한 가을 바람에 스산해진 마음을 덥힐 겸, 서울시립미술관에 방문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이안나 변호사

변호사시험 5회

전) 법무법인 현 소속 변호사

전) 법무법인 한별 소속 변호사

현) 주식회사 포스코이앤씨 사내변호사

현) 한국사내변호사회 정회원

현) 한국여성변호사회 정회원 

현) 대한체조협회 인사위원회 위원

 

 

 

담당 이안나 변호사 Ⓒ (사)한국여성변호사회 뉴스레터발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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